2024.02.01(목) 큐티: 마가복음 11:1-10
<묵상하기>
*왜 나귀 새끼일까?*
감람 산 근처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제자 두 명을
보내셔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다.
주인이 있는
나귀 새끼이니,
끌고 오려고 하면
당연히 주인이
이의를 제기하기
마련이다.
그 때는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하셨다.
두 명의 제자가
누구였는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대로 나귀 새끼를
발견하고, 주인의
허락을 받게 되었다.
---------------------
예수님은 왜 나귀 새끼를
끌고 오게 하셨을까?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다.
야곱이 죽기 전에
유다에게 준 유언에
따르면, 유다는 암나귀
새끼를 포도나무에 매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유다 지파로
오실 실로, 즉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여기서 포도나무는
예수님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자신을
포도나무라 하셨기
때문이다.
포도나무에 매여진
암나귀 새끼는 당연히
그 나귀가 예수님의
소유 임을 나타낸다.
또한 스가랴는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이라 예언하였다
(슥 9: 9).
이처럼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이루시고자
나귀 새끼를 끌고
오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드디어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셨다.
---------------------
그러면 나귀의 주인은
왜 자기 나귀를 끌고
가는데도 순순히
허락하였을까?
그것은 제자들이
"주"를 말하기 위해
헬라어 "퀴리어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퀴리어스는 로마
황제에게 붙이는
칭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그 말은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의미한다.
나귀 새끼의 주인은
제자들이 전한 말을
듣고 메시아가
쓰신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 또한
유대인이므로,
메시아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예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나귀 새끼를 끌고
가도록 기꺼이
허락했던 것이다.
-----------------------
왜 하필 나귀 새끼인가?
유대의 왕이라면
노새를 타야 한다.
전쟁에 승리한
왕이라면 백마를
타야 한다.
그러나 만왕의
왕은 구원을
베푸실 겸손한
왕이시기 때문에,
나귀의 작은 것,
즉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것이다.
------------------------
나귀 새끼를 끌고
온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예수님이 타시도록
했다.
그러자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많은
사람들이 겉옷이나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폈다.
그리고 앞에 가는
사람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고
선창하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고 화답하였다.
그리고 또 앞에 가는
사람들이 "찬송하리로다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하고 선창하면, 뒤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고
화답하였다.
-----------------------------
이렇게 호산나! 하면서
예수님을 찬양하고
환호하던 사람들이
왜 잠시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라고 외치는
성난 군중으로 돌변하였을까?
호산나는 히브리어
"호쉬아 나"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호쉬아 나"는 다윗의
시편 118편에 처음
등장하였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시편 118: 25).
즉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가
호쉬아 나의 본래
의미이다.
그러던 "호쉬아 나"가
아람어 "호산나"가
되었고, 그것이
헬라어로 음역되면서
그대로 호산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호쉬아 나가 호산나로
바뀐 것은 유대 마카비
왕조(BC 164년) 때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시리아의
압제로부터 유대 민족을
구한 마카비를 추앙하면서
"호산나"라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의미 또한
구원하소서!가 아니라,
찬양하라!, 또는 만세! 라는
의미로 바뀌었다고 한다.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이
예수님을 "호산나!" 라고
부른 것은 마카비를
부르던 그 호칭이었다.
예수님을 영혼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맞은 것이 아니라,
로마로부터 유대를
탈환할 마카비와
같은 왕으로
맞은 것이다.
또한 그들이 회복하고자
했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다윗의
나라"였다.
즉 주변의 모든 이방
족속을 무찌르고,
통일 왕국을 이룬
다윗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대가
깨어지자, 그들은
환호하는 군중에서
성난 군중으로
돌변하였다.
<기도하기>
주님.
작은 나귀 새끼는
아직 연약하여
하는 일 없이
그렇게 나무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연약한 등은
예수님을 태우고 당당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다.
저희 연약한 등도
예수님을 태우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소서.
단단한 등이 되어
예수님을 태우고
어디든 담대하게
다니게 하소서.
아멘!
* 두란노 출판사 발행 생명의 삶 본문 묵상을 올리는 블로그 입니다.
'큐티 > 마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뿌리 채 마른 무화과나무 (0) | 2024.02.03 |
---|---|
과실의 동네에 과실이 없다 (0) | 2024.02.02 |
길 가에 앉아서... (0) | 2024.01.31 |
청탁 (0) | 2024.01.30 |
부자라서 슬픈 청년 (2) | 2024.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