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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사무엘하

다윗은 계속 마하나임에 있었다.

by 운석57 2023. 5. 18.

2023.05.18(목) 큐티: 사무엘하 19:9-15

 

<묵상하기>

 

*다윗은 계속 마하나임에 있었다.*

압살롬 반란군은 
소탕되었으나, 다윗은 
계속 마하나임에
머물러 있었다.

언약궤와 예루살렘을 
버리고 황급히 떠났으므로,
다시 돌아올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때 다윗의 환궁을 위한
논의를 먼저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 지파, 즉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들이었다.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는 대략 
세가지 의견이 있었다.

우선 다윗 왕이 자신들을
위해 블레셋을 정복한
것을 기억하여 무조건 
왕으로 추대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현실적인 의견도 있었다.

자신들은 다윗을
대신하여 압살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고, 여전히 압살롬을
지지하나, 그가 죽고 
없으므로 다윗을 다시
왕으로 추대할 수 밖에 
없지 않겠냐는 의견이다.

그 외, 다윗이 다시
대세가 되었으므로,
속히 그를 왕으로 
추대해서 공을 
세워야 한다는
기회주의적인
의견도 있었다.

이처럼 이스라엘 지파들 
내에서는 서로 입장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다윗을 다시 왕으로
추대하자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스라엘 지파 내에서는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시는 것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
지고 있었던 반면, 정작
유다 지파는 잠잠하였다.

그것은 유다지파가 압살롬
반란에 가장 핵심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간파한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통해
협상을 시도하였다.

만약 유다 지파가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는데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나라가 둘로 갈라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를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그래서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관용 정책을 펼쳤다.

압살롬을 추대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유다
장로들의 신변을 
보장하였고, 압살롬의
군 지휘관이었던 아마사를 
다윗 왕국의 군 지휘관으로 
세우겠다고 공약하였다.

다윗의 관용 정책에 감동을
받은 유다 지파는 앞장서서
다윗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암논과 압살롬의
문제에서 공의를 따지지
않은 실수를 범했던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에서도
같은 실수를 범했다.

공의와 균형 잡히지 않은
관용은 결국 더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그래서 예루살렘 환궁 
이후,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지파 사이에
갈등이 조장되었으며, 
세바와 같은 다른 반란 
세력이 일어나는 빌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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