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9(일) 큐티: 요한복음 19:23-30
<묵상하기>
*신 포도주를 적신 우슬초*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독하는 군인들은 요한복음 19:23-30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
나누어 가졌다.
그날의 부수입을
챙긴 것이다.
군인들이 옷을
나누어 가진 것은
시편 22편 18절에
나오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시편 22편은 다윗이
저자인 시편으로,
고난 가운데 조롱을
받고 있는 의인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메시아적
예언을 담은 시편으로
해석되고 있다.
예수님의 겉옷은
4 깃으로 나누어
가졌으나,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라,
나눌 수 없어 제비를
뽑아 가졌다.
예수님이 입으신
통으로 짠 속옷은
유대인의 풍습으로
볼 때, 특별한 것이었다.
유대인의 속옷은
겉옷과 마찬가지로,
여러 조각의 천을
꿰매어 만든다.
제사장만이 통으로
짠 에봇과 속옷을
입었다.
예수님의 통으로 짠
속옷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사역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남자는 사도 요한
한 사람 뿐이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이모라고 기록한 사람은
자신의 어머니 살로메를
가리킨다고 한다.
다른 복음서에
이모라는 명칭 대신
살로메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도 요한과
예수님은 이종
사촌간이었다.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도 십자가
곁을 지킨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글로바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왜 예수님 곁에 마리아란
이름을 가진 여성들이
주로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모세의 누이
미리암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미리암의 로마식
이름이 마리아이다.
미리암은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
여인들을 지휘하여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리는 춤과
노래를 불렀던 여인이다.
그처럼 십자가의 영광에
드시는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한다는 의미로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둘러선
것이 아닐까?
어떤 성경학자는
마리아와 마라가
어원이 같다는 것을
근거로 "마라 (쓴 물)"인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을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와 사도
요한을 바라보셨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사도 요한이 아들이라
말씀하셨다.
사도 요한에게는
네 어머니라 하셨다.
십자가형을 당한
아들을 둔 어머니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책임을
다하셨다.
다른 한편, 새로운 형태의
가족, 즉 공동체를 맺으라는
뜻일 수도 있다.
혈연보다 더욱 진한
새로운 가족 공동체,
교회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
사도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 중심으로
신앙공동체의 질서가
유지되기를 바라신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순종하여,
마리아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에베소에서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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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 것을 아시고,
목이 마르다고 하셨다.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우슬초를
예수님께 드리니
입을 축이신 후,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 영혼이 떠나가셨다.
<기도하기>
주님.
주님은 속옷조차
입지 못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십자가에서
대제사장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쓴 물에 불과한 저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단물이
되었습니다.
주의 영광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미리암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양의 피를 적신
우슬초를 발라 사망
권세를 이겼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희생제물이신 예수님의
피로 적신 우슬초를 발라
영혼이 구원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 두란노 출판사 발행 생명의 삶 본문 묵상을 올리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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