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2(목) 큐티: 고린도전서 6:1-11
<묵상하기>
앞서 여러번 언급된 것처럼,
당시 고린도는 불의한
사람들에게 의해
자행되는 불의함이
만연한 사회였다.
그 불의함이 오늘 말씀
9-10절에 열거되어 있다.
음행, 우상숭배,
동성연애, 도둑,
탐욕, 술꾼, 험담,
속임수, 약탈 등이
모두 해당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채로 그런
불의함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그들 중
일부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으로
씻음을 받고 의롭다
인정받았다.
즉 교인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고린도의
환경이나 문화 속에
불의함이 횡행하다 보니,
교인이 된 사람들도
초심을 잊고 악습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었다.
더우기 바울이라는
영적 지도자가
자리를 비우자 더욱
쉽게 말씀의 권능을
상실하였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분쟁과 음행이
일어났는데 교회는
이에 대해 바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분쟁과 음행을 방조 및
방치하였다.
이처럼 교회 내의 분쟁이
적절하게 해결되지
못하다 보니, 사소한
갈등까지도 모두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일이 생겼다.
그런 해결 방식에
대해 바울이 강력하게
규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성도가 누군가를
기억하라고 강조한다.
즉 성도는 세상을
심판하며, 더 나아가
천사를 심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이다.
성도가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은 마태복음 19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참조한 것이다.
예수님은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말씀하셨다.
열두 지파는 온전한
숫자이므로 온 세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천사를
심판한다는 것은
타락한 천사를
심판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바울은 이처럼 세상을
심판해야 하는 성도가
성도 사이의 모든 일을
세상 법정에서 판결받는
것이 과연 옳은가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세상 법정을 우선시하는
것은 그들이 지혜, 즉
말씀을 경히 여기기
때문임을 경고하였다.
말씀에 능통한 장로나
장로들 앞에서 말씀에
의지하여 분쟁과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그것을 건너뛰고
세상 법정으로
향한다는 것은,
바로 말씀을 경홀이
여기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경히
여기면서 세상적으로
조금도 지지 않는 삶을
살 바에는, 차라리
억울한 일을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편이
낫다고까지 하였다.
바울은 이전에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삶 전반에서 말씀의
생명력이 성령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였으나,
지금을 그렇지 못한
실상을 돌아보고
돌이키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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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사이에 분쟁이나
갈등이 일어났다고 해서
믿음에 실패한 것은 아니다.
구원을 받았다 해도
육신을 입고 살아가므로
성도들 사이에 어찌
의견의 차이가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분쟁이나 갈등이
일어난 것이 실패가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고자
선택하는 방법에 성패가
달려있다.
바울은 세상 법정으로
직행한다면, 분쟁의
이유가 무엇이든,
성도들은 이미 실패한
것이라 단언한다.
그렇다고 세상 법정에
판단을 맡기는 것이
무조건 잘못된 것인가?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다.
먼저 말씀에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에 집중해서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라 강조한 것이다.
이 때 당사자들의 지혜로는
해결이 어려우므로
말씀에 깊이가 있는
믿음의 리더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해결이 안된다면, 그때
다음 단계의 절차를
신중하게 고려해도
늦지 않다는 의미인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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