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1. 24 (금) 큐티: 요한복음 6:41-51
<묵상하기>
예수님이 스스로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 부모를 우리가 다 아는데
어찌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예수님은 그들에게
수근거리지 말라 하시고
말씀을 계속하셨다.
예수님에게 오는 자는
자신의 뜻으로 오는 것이 아니며
모두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고 오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이미
선지자의 입을 빌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끌림에 의해
예수님께 왔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보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보았다.
예수님께로 온 사람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리신다.
그가 누구이든 예수님께 오면
살게 되므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은 자,
곧 생명의 떡을 먹은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은
진리이다.
유대인들은 만나와 같은
떡을 자기들에게 주어
배부르게 해달라고 하나
모세 때 만나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만나는 생명의 떡의 모형일 뿐
생명의 떡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참 생명의 떡이신
예수가 오셨으니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말씀의
마지막 구절에서
나는 너희의 생명을 위해 내 살을
떡으로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실 것임을
암시하시고 있다.
<적용하기>
예수님께서 왜 자신을
굳이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셨을까
의문을 가졌었다.
그냥 나는 생명이니
내게 오는자,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셔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오히려 위와 같은 말씀이
떡을 주식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이해가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의 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내게는 오래동안 어려웠다.
그런데 아마도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굳이 말씀하신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양식으로서 만나라는
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만나와 같은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었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만나는 먹었어도 죽으나
나는 생명의 떡, 그 자체이므로
먹으면 영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표현하신 것 같다.
즉 만나와 대비시켜
온전한 구원으로서의
예수님을 나타내시고자
생명 떡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 같다.
둘째로 만나는 누구의 희생을
요구함이 없이 하늘에서
그냥 내리는 것이었으나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에는
예수님의 희생이 담기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영생을 주기 위해
자신의 살을 주어 먹게 한다는
희생을 나타내시기 위해
생명의 떡이라는 표현을
쓰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도>
생명의 떡이신 주님.
영적으로 굶주려 있음에도
헛된 것을 구하는 저에게
예수님 자신이 해결책이요
방법임을 알려주신 주님.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알게 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그 생명의 떡을
허겁지겁 먹지 않게 하시고
오랫동안, 아니 죽는 날까지
그 맛을 음미하게 하시며
먹고 또 먹게 하시어
제 영혼의 근육이
튼튼해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웬만한
시련과 고난에 대해
끄덕도 하지 않게 하시고
요동치 않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하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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