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3(목) 큐티: 로마서 9:14-24
<묵상하기>
하나님이 약속의 자손으로
이삭과 야곱을 택하셨다고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불의하시다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특히 사람의 중심을 보시므로
지금은 동일하게 죄악 가운데 있어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올 자와
끝까지 갈 자를 아신다.
가나안 족속은 그 죄가
한계점에 도달하였을 때
멸망에 이르렀다.
즉 돌이킬 수 없는 족속이라는
것을 이미 아셨으므로
그 죄가 다 찼을 때
그들에게 어떠한 긍휼함도
보이지 않으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주권이 우리의 열망이나
우리의 열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던질
사람이 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세워졌다면
누가 그 뜻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하나님은 내게
죄를 물으실 수 없다.
내가 완악한 것도
내가 죄를 짓는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당신은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되묻고 있다.
당신은 지은 자인가?
지음을 받은 자인가?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있는냐고 반문한다.
토기장이는 진흙 한 덩어리로
자기의 소용대로
귀히 쓰일 그릇을,
천히 쓰일 그릇을 만든다.
토기장이도 그러한
권한이 있을진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 권한을
임의로 사용하지 않으신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참으심과 관용으로
바라보신 후 멸하기로
결정하신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 자손이
얻기까지 400년 이상이
걸린 것이다.
하나님은 죄악 가운데
당장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가나안 민족을 오래 참으심과
관용으로 기다리셨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진노를 보이실 그릇과
긍휼을 보이실 그릇을
택하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권적 의지에 따른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인해
건져진 그릇이 바로
이방인인 우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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